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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강남구청 로비에서 만난 르누아르

alexis_2026 2023. 3. 28. 02:52

오늘 저녁에는 강남구청에 다녀왔다. 행사 공지를 읽었을 때는 이미 신청 인원이 꽉 찬 상태였기 때문에 대기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안내 문자를 받았다. 지난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에서 은은한 나무향이 편안함을 주었던 기억도 있고 해서 르누아르를 중심으로 어떤 식으로 행사가 구성될 지 상당히 궁금했다. 나름 신경 써서 오늘 아침에는 향수도 뿌리지 않고 나왔다. 

도서관에서 발송한 안내 문자, 티스토리 사진은 정말 이게 최선일까?

 

 

그리고 낮에는 시네도슨트 2회차 예매를 했다. 그러고보니 시네도슨트는 영화관과 미술 작품의 만남이다. 그리스 편에서는 많은 조각과 건축물, 대서사시 등 모두가 기대된다. 수강신청처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리가 마감되는 속도를 보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카드 할인 5000원을 고려해도 고민없는 가격은 아니지만, 일단 하고 본다. 공공요금이 더 오를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https://www.megabox.co.kr/movie-detail?rpstMovieNo=23020100 

 

[메가박스][시네도슨트 - 그리스 신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신화가 그린 그림,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리스 신화를 다시 읽어 봅니다.안현배 미술사학자의 안내에 따라 감상하는 그리스 신화시대의 시작에서 몰락까지.[그리스 신화 2.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www.megabox.co.kr

 

 

 

저녁 시간에 맞춰서 구청에 도착하니 이미 자리가 2/3는 차 있었고, 브로셔와 함께 시향지가 든 봉투와 팔찌도 받았다. 입구 한 쪽엔 포토월이, 다른 한 쪽엔 관련 도서와 오늘의 출연진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 테이블도 설치되었고, 따스한 느낌을 주는 꽃도 놓여있어 관공서가 주는 특유의 느낌이 상쇄되었다. 안내도 신속, 정확, 친절해서 기분좋게 자리에 앉았다. 기대 이상으로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새 해가 길어졌다

 

 

 

 

시향지

 

먼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 연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공연장처럼 조명을 활용이 가능한 환경이라면 좀더 몰입할 수 있었겠지만, 구청로비와 2층의 스위치를 누군가 하나하나 끄고 켜면서 별도 조명까지 설치하게 되면 오히려 너무 번잡해지는 등 여러 진행상의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내가 잠시 눈을 감고 듣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였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고 정우철 도슨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고, 도자기 공방에서 일하던 10대 소년 르누아르의 상업 도자기 그림이 첫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회화에 재능을 보였던 르누아르는 모네와 바지유를 만났지만, 바지유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전사하고, 그후 인상주의 첫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설명대로 대형 스크린에 펼쳐진 르누아르의 <퐁뇌프>의 유난히 푸르른 색감이 전쟁과 파리코뮌 이후 결코 밝을 수만은 없는 파리와 대비되기도 하면서 역시 그럼에도 삶은 흘러간다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나는 조지훈의 시 '승무'와 백석의 시 '여승'을 떠올렸다. 하이얀 고깔 속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서, 지아비와 어린 딸을 잃은 여인과 불경처럼 서러워하는 화자로 이어지는 정제된 번민과 설움에 대한 표현은 오히려 독자에게 한층 더 심화된 감정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이렇게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삶은 계속된다. 

 

<물랭 드 가 갈레트의 무도회>는 시트러스 향과 함께 감상하였다. 잔잔하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춤을 추기도 하고 한쪽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일상의 행복이 캔버스 안에서 다시 밖으로 흘러나온다.

 

 

신윤복의 <주유청강>은 상복차림으로 뱃놀이를 하는 양반이 등장하지만, 르누아르의 <뱃놀이 일행의 오찬>에서는 등장인물의 엇갈린 시선을 통해 서로에 대한 엇갈린 마음이 표현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민 계급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파리는 그야말로 모더니티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프랑스도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신음해야 했다. 한편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에도 신문물이 유입되었고 앞서 언급한 두 시인처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청년들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 1920,30년대 경성에도 모던 걸, 모던 보이가 등장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시민 계급처럼 혁명을 통해 쟁취한 자유는 아니었다. 결국 본색을 드러낸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모집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강제 징용으로, 위안부로 낯선 땅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민 계급의 형성 과정이 매우 다른 경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성에 대한 낭만적 묘사나 재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자유'는 어디에서 왔는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유는 한일 관계를 둘러싼 최근의 상황 탓이다. 관련 뉴스를 클릭하기가 꺼려질 정도이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네'

 

일상의 풍경을 행복을 가득 담아 캔버스에 그려낸 르누아르와 함께 저녁을 보내면서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잔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나이들어 갈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적당한 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아름답게 갈 수 있었으면. 

 

 

바이올렛 시향지가 마음에 들어서 침대 헤드에 가져다 놓았다. 시간이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오늘밤은 한층 더 편안한 잠자리를 보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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